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산도 대첩 (문단 편집) == 전투 전개 == >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 >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4번째 기사 6월 14일 일본 수군은 [[구키 요시타카]]를 중심으로 부산포에 집결했지만, 이미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이 약체임을 증명한 와키자카는 7월 7일, 자신의 함대만을 이끌고 거제도로 단독 출격을 개시했다. 그 날 저녁 무렵에 왜선 70여척이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확인한 조선 수군은 8일 한산도 근해에서 이를 확인했다. 일본군의 세력은 대선이 36척, 중선이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 구성된 함대였다. 이전의 해전처럼 항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를 포위 섬멸하는 형태로 전투를 치르기엔 견내량 주변이 협소하고 암초가 많은데다 조류의 흐름도 역류[* 물론 [[명량 해전]] 때의 [[울돌목]]처럼 가공할 수준의 조류는 아니지만 조선 수군에게 불리한 건 사실이었다.]여서 판옥선이 서로 부딪힐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함대 간의 전면전이 불가피하자 조선군은 한산도 근해에서 적들을 유인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대여섯 척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를 미끼조로 투입하여 일본군 함대를 전체를 건져내는 유인책을 시작으로 작전을 시작했다. 식견이 있는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매복을 의심할 상황이었지만, 와키자카가 이미 휘하의 1,500명으로 조선군 5만을 격퇴한 [[용인 전투]]를 경험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으므로, 일본군 함대는 손쉽게 조선 수군이 던진 미끼를 물었다. 게다가 조선군의 퇴각을 확인하자 와키자카는 '''자신의 함대만을 이끌고''' 독단적으로 한산도 연안의 다도해 내로 거침없이 진격했고, 퇴각하는 척하던 이순신의 함대는 해협을 지나 복병을 배치해둔 작전 수역에 진입했다. 와키자카의 함대가 들어서자 한산도 좌우의 섬에서 기다리던 전선들은 3개 부대로 나뉘어 [[학익진]]을 형성, 일본 수군을 포위한 뒤 [[십자포화]]로 공격했다. >7월 7일 카라시마[* 거제도의 일본측 명칭.] 앞쪽으로 배를 밀어 나아가니 마침 해협 안에 판옥선 4~5척이 있는 것을 보고 조총을 쏘며 반각 정도 싸움을 걸었다. 판옥선이 슬금슬금 뒤로 빼는 것을 빈틈을 주지 않고 공격하여서 3리 정도 쫓아갔을 무렵이었다. 판옥선이 막 해협을 지나 넓은 곳으로 나아갔다. 한번에 키를 돌려 잡고는 큰 배를 양쪽으로 벌려세워 아군의 배를 둘러쌌다. '''이는 유인하여 무찌르는 계책임이 분명했다.''' 아군의 배에서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적은 큰 배, 아군은 작은 배이므로 당해내기 힘들어서 원래 온 해협으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적의 판옥선이 밀어붙여 와서는 아군 배에 호로쿠비야[* 화약이 담긴 폭발탄. 이름은 '히야', 즉 불화살이지만 화살보다는 주로 구체 형태의 포탄인 '호로쿠다마' 형태로 발사했다. 비격진천뢰나 신기전 등 각종 조선측 화약무기를 뭉뚱그려 이렇게 부른 것으로 보인다.]를 던져넣어 곧 배가 불타올랐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가신인 와키자카 사헤에, 와타나베 시치에몬을 시작으로 이름 있는 자 여럿이 전사했다. >---- >와키자카기(脇坂記) {{{#!wiki style="text-align:center; border: 2px solid #000000; background-color:#FFFFFF; margin:0 auto; display:table" {{{#!wiki style="padding:5px" '''{{{#000000 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서 학익진 대형의 판옥선이 십자포화를 퍼붓는 장면(gif). }}}'''}}}{{{#!wiki style="background-color:#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Hansando_gif1.gif]]}}}}}}}}} 때마침 역방향으로 해류가 바뀌었고, 조선 수군은 이에 총통과 [[신기전|화전]]을 쏘며 전진했다. 전 방향에서 날아드는 탄망에 주력선인 세키부네(關船, 관선)는 물론이고 일본군 내 주요 가신들이 탄 아타케부네(安宅船, 안택선)까지 줄줄이 격침되고, 일본군은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 [[이순신]]의 장계에 따르면 조선 측에서는 수병 '10명'이 부상당하고 3명이 전사했다.] 40척이 넘는 군함을 잃었다. 심지어 지휘관인 와키자카 본인도 지휘선을 관통한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다. 이후 그는 속도가 빠른 다른 관선을 타고 [[김해]]로 빠져나가 목숨을 건진다. 와키자카의 잔존 부대는 200-400여 명 정도가 한산도에 배를 내버려둔 채 인근의 무인도로 도망쳤으며,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 등은 멀리서 해전을 관망하다가 일본군의 군선들이 모두 격침당하자 방향을 바꾸고 김해로 후퇴했다. 그런데 와키자카는 실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조선 수군이 쾌속선으로 갈아탄 와키자카를 계속 집요하게 쫓아온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야스하루는 노 수가 많은 쾌속선으로 갈아탔다. 기동이 자유로우며 선체가 무사하다고는 하나 갑옷에 화살을 맞는 등 구사일생의 위기에 빠졌다. 적선이 쫓아오며 계속 불화살을 쏘아대니 야스하루의 고속선은 마침내 [[김해]]로 철수했다. 적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부하 200여 명은 육지에서 50정[* 1정은 109m, 즉 5.45km이다.] 떨어진 작은 섬에 잠시 배를 대고 상륙했는데, '''판옥선이 쫓아와 아군 배를 불살라버렸다.''' >마나베 사마노조라는 자는 당일 그 배의 선장이었는데, 그 배가 불타버린 이상 목숨을 건져봐야 별 수가 없고, 군중에서 다시 아군을 마주할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여 할복해 죽고 말았다. >---- >와키자카기(脇坂記) 와키자카는 조선의 무인도에 상륙했는데 마지막 남은 배를 판옥선이 쫓아와 불태우고 가버렸고, 오고 갈 데가 없는 상황에 절망한 선장마저 자살했다. 죽음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뒤에 남아 있던 구키, 가토도 와키자카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쫓아오지만, 조선의 판옥선 함대의 위용 앞에 박살이 난다.[* 이것이 안골포 해전으로, 와키자카기에도 정확히 언급되어 있다.] >카라시마의 작은 섬에 올라와 있던 나카츠카사[*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관명.]와 그 가신들은 '''13일간 솔잎과 [[미역]]을 먹으며 불탄 배의 널빤지로 뗏목을 만들어 육지로 올라가려 하였다.''' 판옥선이 물러나는 틈을 잘 보고 있었는데, 카라시마 밖에 일본의 병선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듣고 판옥선이 갑자기 물러났다. 그 틈에 5~6명씩 뗏목에 타고 그 섬으로부터 육지로 오던 중 '''판옥선이 다시 키를 돌려 와서''' 바닷가에서 (아군) 10여 명을 사살했다. 남은 자는 200여명 남짓이었다. 겨우 호랑이 아가리를 벗어나 목숨을 건져 [[김해]]로 돌아왔다. >---- >와키자카기(脇坂記) 와키자카는 그야말로 [[캐스트 어웨이|눈물나는 모험]]을 벌여 간신히 도주에 성공한다. 13일이나 [[미역]]과 솔잎을 뜯어먹으며 살아남고, 먼바다에 뜬 적의 눈치를 보다가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가서 남해의 그 거친 물길을 너덜대는 뗏목으로 5km나 저어갔단 소리다. 조선 수군에게 추격당해 포화를 맞으면서! 일본의 역사 기록들이 한국처럼 데이터베이스화가 되어 있지 않다 보니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료들이어서 그렇지, 시점을 일본 입장으로 돌려서 보면 '''조선의 판옥선이 순식간에 지옥에서 올라온 괴물로 보이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의 판옥선을 마주치자마자 그 스펙 차이에 압도당했으며, 한산도 해전 이후로 내내 그 스펙을 뛰어넘지 못해 전전긍긍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